지난 글(클릭)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데도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와 그 기저에 대한 노진준 목사의 의견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며 매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식 중 하나로서 '외식의 경계'에 대한 잘잘법 노진준 목사의 마태복음 6장의 해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답의 키_ 외식(위선)
마태복음 6장 전체는 '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셨던 외식의 종류는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의 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세 가지 경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금식, 그리고 구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 행위를 모두 꼬집으셨는데, 첫째로 기도할 때는 골방에서 하고 시장 어귀나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금식 또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제에 대해서도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시며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경건 활동을 모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한 행위'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반대말이 '사람에게 안 보이려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방이 하나님이 계시는 최고의 장소는 아니라는 것이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의 의미 역시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나님께 보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기에 굉장히 궁금한 부분입니다만, 잘잘법엔 언급되지 않았기에 생략합니다).
또 다른 종류의 의선으로서의 '염려'
우리가 염려를 하는 이유는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면서 정작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이원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는 진실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교회 문 밖으로 나가면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죠. 교회에서는 굉장히 인자한 장로님인데 회사 대표로서의 그는 너무 무정해서 위선자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의 문제라기보다는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 장로님이 보이는 겸손함과 온유함이 교회 안에서 만큼은 진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두 개의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세계관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죠. 그러할 때 먹고 마시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의 뉘앙스는 어떤 것일까요? '염려 좀 하지 마!"라는 책망일까요? 이건 오히려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먹고사는 문제마저 주관하신다는 위로말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지키시게 그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결국 삶이라는 여정이 항상 우리는 누리고 힘들게 하지만 그래도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가족이 아픈데 어떻게 염려가 안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라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우리를 또 하나의 위선으로 이끄는 올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잘법 노진준 목사의 고견처럼 이 말씀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받고 그러한 하나님을 예배당 밖 세상살이에서도 인정하고자 노력한다면, 신앙이 있는데도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밤이 조금은 적어지지 않을까요? 그럼 오늘 하루만이라도 염려와 근심 가운데서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 되시는 그분을 잊지 않기로 해 봐요. 다음 글은 '구원'에 대한 잘잘법 내용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그럼 그때까지 잘 믿고, 잘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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